2002년 10월9일 다나카 고이치씨는 매일 하는 일상대로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8시에 출근하였다. 마침 뉴스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도쿄대 명예교수 코시바 마사로씨가 공동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2000년과 2001년에 이어 3년 연속으로 일본인이 노벨상을 수상하는구나” 라고 중얼거리며 그날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곧 있을 노벨화학상 수상은 꿈도 꾸지 않았고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로 여겼다. 그날 오후 그는 전화를 받았다. “지금부터 15분 뒤에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올테니 받아주세요.” 그리고 조금 뒤 외국에서 영어로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는 통화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되다니 영광이군. 설마 노벨상이 그 유명한 노벨상은 아닐테고 노벨이라는 또 다른 비슷한 이름의 상이 있었던가?”
통화를 마치자 그가 근무하는 시마즈제작소의 회사 전화기 50여대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의아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전화기는 모두 다 다나카 코이치씨를 찾는 전화였다. 모두 자기를 찾는 전화였지만 시마즈 제작소에는 다나카 코이치라는 동명이인이 2명 더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온 전화라고 믿지 않았고 회사에 기자들이 물밀듯 밀려 왔을 때도 “본인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뭘 잘못 아신 게 아니냐?”라며 회사 측에서도 반문할 지경이었다. 가족들도 동명이인으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노벨화학상 수상자는 존B.펜 쿠르트 뷔트리히, 다나카 고이치”라는 뉴스가 전해지자 본인 스스로도 경악할 지경이었다. “Nobel Congratulation”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동료들이 축하해 줄 때도 속칭 몰래카메라를 당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회사 격리실로 이동되어 취재진이 대거 몰려들고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수염도 깎지 못하고 양복으로 바꾸어 입을 사이도 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본인이 노벨상 수상자로 확인된 이후에는 그야말로 ‘눈 뜨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매일 타는 전철로 집으로 갈 수 없어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서 밤을 지새며 뉴스를 보았고, 다음 날 아침 신문에 게재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실감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모교인 도후쿠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가 날아들고, 쏟아지는 강연 요청과 수많은 인터뷰로 인해 일을 못하고 양복이 고작 2벌뿐이어서 새 양복을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요청 공세를 하는 바람에 정작 양복을 못 사고 돌아온 적도 있다.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다니던 시마즈제작소 직장도 엄청 유명해져서 261엔이던 주가가 9일 만에 475엔으로 수직 상승하였다. 사장이 고마움에 당장 이사로 승진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겨우 사양해서 부장으로만 승진하기도 했다. 그 대신 회사에서는 바로 다음 해 다나카 코이치 기념연구소를 설립해 소장 자리에 앉혀버렸다. 승진도 고사한 사람에게 진짜로 연구만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는 학사학위로 첫 번째 노벨상 수상자이다. 2004년에 한국 제주도를 방문해 대한화학회 초청으로 94회 총회 및 학술발표회에서 기조 발표를 하기도 하였다.
다나카 코이치는 1959년 8월3일 도야마현 도야마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생모가 병사해서 삼촌이 맡아 기르다가 입양하였다. 본인은 줄곧 삼촌 부부를 친부모로, 사촌 형 2명과 누나 1명을 친형제로 알고 자랐다. 그러던 중 대학 진학을 위해 발급받은 호적초본에서 자신이 양자로 등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충격으로 방황하다가 성적 미달로 1년간 유급한 적도 있었다. 그 후 삼촌 부부와 사촌 형제들은 친가족이나 다름없다고 깨닫고 방황에서 돌아와 정상적으로 늘 가족과 사이가 좋게 지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소니사 입사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다시 중소기업인 시마즈제작소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그는 시마즈제작소 기술연구본부 중앙연구소에 배속되어 화학 분야와 관련된 기술연구에 종사하였다. 그가 후에 말하길 소니사에 입사하였으면 지금도 전기기술자로 이름 없이 근무하였겠는데 다행히도 시마즈제작소로 와서 화학 분야로 기술연구에 종사하게 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고 술회하였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대표적 연구 업적은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SLD)’으로, 거대 분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분석기법이다. 단백질과 같은 거대 분자는 레이저를 쬘 때 결합구조가 파괴되는 문제가 있어 분자 개개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코발트 나노 입자와 글리세롤의 혼합물 상에서는 레이저를 쏘아도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고 이온화되는 현상을 발견해 종래의 방법으로도 질량분석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가 발명한 분석법을 ‘MALDI-TOF MS’ 라고 하는데 이는 의학계에서 오히려 더 주목받는 기술이다. 종래 중증 감염증 환자가 왔을 때 어떤 균에 의한 감염인가를 감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MALDI-TOF는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뿐 아니라 중증 감염증이 어떠한 균인지를 파악해서 최대한 그 균에 맞는 항생제를 쓰도록 하여 환자의 생사와 예후에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노벨화학상보다는 오히려 생리의학상에 부합할 정도로 훌륭한 업적을 내놓은 것이다.
수상의 계기가 된 연구논문은 일본 내에서 일본어로만 발표하였고 영어로 국제학술지에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힐렌캄프와 카라스라는 학자가 자신의 논문에 이 일본 특허를 인용했다고 기재하면서 국제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노벨상 수상에는 그만큼 운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연구는 2014년 혈액으로부터 알츠하이머병의 원인 물질을 검출하는 단계까지 이어졌고 병의 조기 진단과 항체를 이용한 신약 개발이 이어지는 기술의 단계까지 진전되고 있다.
그는 노벨상 수상 뒤에도 온화하고 어눌한 행동, 편하다는 이유로 양복을 안 입고 시마즈 작업복으로 방송 인터뷰에 응했으며 NHK로부터 그해 연예인 홍백전에 심사위원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나는 연예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일개 샐러리맨으로 노벨상이라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수상하였지만 작은 중소기업의 기술자로서 다나카의 겸허한 인간성도 많은 국민들로부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정작 본인은 언론들이 온후한 인품을 가진 다나카라는 표현에 매우 난처해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설명할 때 “다행히도”라는 수식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는 인생의 출발점에서도 회사 입사에서도 연구실적에서도 “다행히도” 실패를 거친 후 다음번에 일어설 수 있었음을 늘 되뇌인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환호받는 삶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선택하였고 출세나 공명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행복과 긍지를 갖고 만족하는 삶이란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 월급쟁이 아저씨인 것이다.
오늘도 행복한 삶을 위해 웃는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