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김원기, 이철, 유인태, 이부영, 원혜영….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현 집권세력의 핵심이라는 것, 둘째는 모두 1996년 15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었다는 것이다.
1995년, 이미 분란이 점정에 달해 있던 야당 민주당은 여당이 잃은 민심을 주워모아 지방의회에서 대약진하고 조순을 서울시장으로 당선시키면서 오히려 더욱더 분당의 속도를 높였다. 김대중이 돌아온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문민개혁이 후퇴하고 야당의 지도력이 고갈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김대중이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창조적인 보수정치인이었다는 것이 그가 정계은퇴를 번복할 충분한 명분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점령군처럼 들이닥쳐 야당을 깰 이유는 없었다. 정치불신만 깊어졌고, 김대중이 새로 세운 국민회의가 연신 차기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선다는 전망을 흘릴 때에도 신통찮은 반응은 바뀌지 않았다.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것이 그해 가을이다. 그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은 상한가를 쳤고 지지율 1위에까지 이르렀다. 1990년 3당합당 이후에 쓰인 ‘꼬마 민주당’이라는 별칭은 1996년의 민주당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민자당에서 떨어져 나온 자민련보다 의석수가 많았고, 장을병, 홍성우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개혁신당과도 합당을 이룬 참이었다. 당 고문이었던 이기택씨의 인기야 시원찮았지만 세간에서는 통합민주당의 젊고 튀고 깨끗한 의원들을 ‘스타 군단’으로 불렀다. 오늘로 치자면 ‘노회찬들’이었다(단,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을 뿐이다).
김원기, 이기택, 장을병 등의 당 수뇌부가 각각 전북, 부산, 강원에서 거점을 확산하고 스타군단이 수도권을 휩쓸어 제1당에 이른다는 것이 통합민주당의 선거전략이었다. 제1당은 커녕 제1야당도 어려울 수는 있었으나 어리석은 기획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기성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조소가 너무 깊었다. 이들을 잠재울 방법은 하나였다. 선거판을 이들이 비난했던 지역주의와 3김정치의 전장으로 만들기. 불행히도 선거는 이 길로 나아갔다.
김원기는 전북 정읍에서 동교동계 막내인 윤철상에게 더블스코어로 졌고, 이기택과 김정길은 부산에서 낙마했다. 김원웅은 자민련의 충청지역주의에 베였고, 수도권에서는 국민회의와 표를 나눠먹느라, 전두환을 감옥에 집어넣고 기세 올리는 여당 신한국당에 밀리느라, 노무현, 유인태, 이철 그리고 박계동까지 낙선했다. 장을병, 이부영, 제정구를 포함해 살아남은 후보는 9명. 전국구 여섯을 합쳐도 원내교섭단체를 꾸릴 수 없었다.
무소속 의원과 손을 잡아 원내에 진입하려는 구상을 실행하기도 전에, 티비 토론에서 승리를 장담한 이규택을 비롯한 당선자들이 잇따라 신한국당으로 줄달음쳤다. 이기택계와 개혁소장파의 불협화음은 타당과의 갈등에 맞먹을 정도로 높아졌고, 결국 개혁소장파 주도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탄생했다.
김대중과 이회창의 지지도를 갉으며 그들에 비길 만한, 혹은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조순이 민주당 후보로 선출될 무렵이 구당의 최후 기회였지만, 조순이 이회창에게 후보직을 양보하며 한나라당을 결성하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기택계는 물론 박계동, 이부영, 제정구는 한나라당으로, 김원기, 노무현, 유인태는 국민회의로 향했다.
그뒤 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에서 통합민주당 및 통추 출신 정치인들은 동교동계와 결별한 정풍파들과 연합하여 거짓말처럼 주류 집권세력이 되었다. 거짓말 같은 일은 계속 벌어지는 중이다. 이철을 철도공사 사장으로 앉혀 KTX 노동자들을 울리는 노무현 정권은, 한때 그쪽의 경제브레인이었던 이조차 힐책할 만큼 졸속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보수세력의 본질일까? 단순히 그렇지만도 않다. 노무현이 분명한 진보파는 아니었겠지만 진작부터 딱히 보수파였던 것도 아니다.
1996년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먹었던 소년은 성년을 넘겨 투표권을 얻은 이래 한번도 기권하지 않았다. 이번 지방선거와 내년 대통령선거에서의 내 투표방침 역시 또렷하다. 허나 기표구를 잡는 내 손은 매번마다 후들거릴 것이다. 통합민주당 패배 후 10년이 흘렀다. 이제 패배보다 더 무서운 환멸이 어른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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