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대를 받아도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다! 그도 그럴 것이다. 미친 체하고 떡목판에 엎드러진다는 셈으로 미친 체하고 어리광 비슷한 수작을 하거나, 스라소니 행세를 하거나 하여, 어떻든지 저편의 호감을 사고 저편을 웃기기만 하면 목전에 닥쳐오는 핍박은 면할 것이다. 속으로는 요놈 하면서라도 얼굴에만 웃는 빛을 띠면 당장의 급한 욕은 면할 것이다.
공포, 경계, 미봉, 가식, 굴복, 도회, 비굴… 이러한 모든 것에 숨어사는 것이 조선 사람의 가장 유리한 생활 방도요, 현명한 처세술이다. 실상 생각하면 우리의 이러한 생활 철학은 오늘에 터득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봉건적 성장과 관료전제 밑에서 더께가 앉고 굳어 빠진 껍질이지마는, 그 껍질 속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말이다. 염상섭은 이 소설을 통해 ‘천대를 받아도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일제강점기 치하의 조선 사람들의 잘못된 정신세계를 비판했다.
조선 사람들의 현명한 처세술은 봉건적 성장과 관료전제에서 익숙해진 ‘공포, 경계, 미봉, 가식, 굴복, 도회, 비굴’ 등이다. 5천년에 걸친 전제 왕권 체제에서 조선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으로 쟁취하는 자유보다는 목전에 닥쳐오는 핍박을 면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생활 방도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진 국가다. 지난 1987년 개헌 이래 의원내각제 요소를 가미한 대통령제를 채택했지만, 3김 시대가 남긴 보스정치의 폐해는 아직도 우리 정치권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총선 공천권’은 정치인의 생사여탈권이다. 보스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한 정치인은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 낭인’일 뿐이다. 보스의 눈에 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피눈물나는 ‘현명한 처세술’로 둔갑한다.
요즘 여권 내의 권력 투쟁이 한창이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가 다투고 있다. 박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그 책임을 물어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의 행위를 배신 정치로 규정하고, 선거에서 심판하자고 선언하자, 유 원내대표는 즉각 고개를 숙여 사과했지만 사퇴는 안하고 버티고 있다.
친박은 윗분의 분부를 받들어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기정사실화하고 공세를 이어가고 있고, 비박은 결사반대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여권 내부의 권력투쟁 핵심은 ‘총선 공천권’ 장악에 있다. 박 대통령으로선 조기 레임덕을 차단하기 위한 최고의 무기가 총선 공천권이고, 비박은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천대를 받아도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진 정치인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을 만들어 현재와 같은 볼썽사나운 권력투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정치인을 원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국민이 그들만의 권력투쟁을 메르스보다 더 위험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