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경섭(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

Ⅰ. 머리말

16세기 후반 조선 사상계의 지형은 통설적으로 영남의 퇴계 남명학파와 근기의 율곡 우계학파의 양대 노선이 중심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황과 조식, 이이와 성혼에 의하여 동인과 서인이 형성되었고, 이들 학파 내지 정파가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이끌었다.

16세기 후반 조선의 사상계를 볼 때, 도통론적 계보에서 누락된 학자의 위상을 재고할 필요가 있는데, 월정 윤근수가 대표적이다. 윤근수의 문인으로 지목되는 장유, 정홍명, 정엽, 조익, 김육, 김상헌 등은 17세기 전반 조선의 문단과 정계를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삶과 사상에는 시대적 환경이 중요한 원인을 이루지만, 중국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동했다. 이런 점에서 온 생애를 중국이라는 문제를 짊어지고 살았던 윤근수와 위 여섯 명의 사이에서 보다 의미있는 학문적 친연성을 찾아볼 수 있다.

Ⅱ. 윤근수의 학문 연원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림의 핵심이었던 김식의 아들 김덕수의 집에서 배운 윤근수가 김덕수의 조카 김권에게도 수학한 점을 감안하면 조광조와 김식에서 전해진 기묘사림 학맥이 김덕수를 거쳐 그에게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윤근수가 중국 중심의 학문세계를 개창한 것은 그가 관직에 있던 시대적 정황을 참작해야 한다. 중국유학의 통로가 막힌 상황에서 외교현안을 한어로 소통할 사람은 적었다. 한어에 능통한 윤근수는 종계변무와 원군 청병, 광해군의 세자책봉 등 조·명 간의 외교문제가 빈발했던 정황에서 명의 사조에 직접 접근한다.

윤근수의 중국사 인식은 중화질서를 회복한 명의 성대함을 칭송하는 맥락이지만, 유학자들이 흠모하던 당·송보다는 진·한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는 점이 특이하다. 또 명에서 조선의 문묘 제도를 자신들과 동일하게 개정하고, 한대 유학자들을 출향시키라고 압박하자 ‘한대의 훈고학이 없었다면 이정과 주자와 같은 명철이 배출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왕세정의 말을 인용하며 반대한 일 역시 주목할 만하다.

Ⅲ. 윤근수 문인들의 구성과 학풍

하나의 학파를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승·교유관계로 집단적 동질성을 지닌 특정한 학풍을 형성하고, 학문적 전수 혹은 계승관계에 대한 내부의 의식적 자각이 필요하다. 김상헌, 조익, 장유, 정홍명, 이정구, 김육, 조위한, 조경을 월정학파로 보는데, 진한고문론이라는 문풍을 넘어서 현실 인식과 사상적 차원에서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세력으로 정치와 문단의 실세로 군림한 핵심사류이며 연혼 관계, 특히 왕실과의 혼인으로 정치·사상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월정학파 학인들에게는 경세론을 중심으로 한 현실적인 시세 인식과 학풍의 공통점이 있다. 요컨대 17세기 전반 월정학파는 병자호란 직후 왕조재건을 놓고 주자학을 전범으로 삼은 김장생과 송시열 등 호서산림과 상이한 인식을 지녔다. 진한고문론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문장론의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와 문화를 전범으로 삼아 조선사회를 일신하고자 했던 보다 광범위하고 거시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Ⅳ. 맺음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활약했던 윤근수와 그의 문인들은 중국이라는 현실적 규정력을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당대 서인 학통의 주류로 떠오르던 사계학파와는 상이한 학풍과 현실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월정학파는 송대 주자학을 국가 운영의 유일한 전범으로 삼으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던 김장생과 송시열 등 호서산림들과 맞서는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월정학파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하였다. 월정학파의 사상적 근간인 진한고문론이 방법론에 치중한 나머지 한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이념을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월정학파에 속했던 학자들은 17세기 중반 사상계의 재편 과정 속에서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