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심판관을 믿지 않는다/판정승을 기대하지 않는다/심판관은 쉽게 매수되기 때문이다(최승호 ‘권투왕 마빈 해글러’)
그랬다. 심판관이 쉽게 매수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돈으로, 권력으로.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판의 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7일 밝힌 19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과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 내용이 대표적 사례다. 모두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자의적 요구에 따라 수사방향이 미리 결정돼 집행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형이 선고됐던 8명에게 대법원이 1975년 4월8일 상고를 기각한 뒤 18시간만인 다음 날 새벽 4시 형이 전격 집행됐다. 전 세계가 지목한 이른바 사법살인이다.
지난 10월10일 퇴임한 유지담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어 “법복을 입고 법대 위에 앉아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관은 그 법대 아래에 내려가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건 당사자의 발을 씻겨주는 심정으로 그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려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고, 후배 법관들에게 진실된 권위를 되찾아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은 지난 9월26일 열린 취임식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그 거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법부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일 뿐, 사법개혁은 요원한 일로 대다수 국민들은 바라보고 있다. 법원과 검찰, 국가정보원 등 권력핵심기관은 조직이기주의로 똘똘뭉친 ‘조폭집단’으로 비치거나, 아직도 돈과 권력에 매수된 ‘시녀’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서울중앙지검은 13일 이른바 ‘삼성 엑스파일’에 나오는 삼성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의혹과 관련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횡령과 뇌물공여 혐의로 고발된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이회장과 같은 혐의로 고발된 홍석현 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 등도 모두 무혐의 처분할 예정이다. 반면 도청 테이프 내용을 보도한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는 기소할 방침이다.
법원은 최근까지도 삼성그룹과 여타 재벌 등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잇따라 내리거나 선고를 수년째 연기하는 방식으로 친재벌적인 속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믿을만한 법 집행자들이 드문 현실이다.
도대체 어떤 법이 있었는지/법왕같이 의젓한 법관이 검은 법복을 걸치고/지옥의 법왕청에서도/의젓하게 법관 노릇을 할 수 있을지/나는 모르겠다(최승호 ‘법’) |